우리동네성북
고려시대는 어땠을까요?
고려시대에 성북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대체로 정종때까지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부로 불리웠다.
고려 건국 초 양주로 불리웠던 서울지방은 성종2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각 지방은 대부분 지방호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한강 이북의 서울 지역인 양주 지방은 당시 뚜렷한 호족이 나타나지 않고
왕건의 공략에 의해 점령된 지역으로 왕권의 직할지 성격을 띠었다 하겠다. 그런 인근 광주는 태조를 섬겨 고려왕조의 창업을 도운 왕규의 세력판도였다.
왕규는 광주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지위가 대광에 까지 이른 사람으로 자기의 두 딸을 태조의 비로 들이고 또 한 딸은 혜종의 비로 들여
그 외손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한 책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양주는 898년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점령한 지역으로 태봉의 직할지가 되었다가 고려에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935년 후백제왕 견훤이 고려에 항복해 오자 왕건이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준 것으로 보아 당시 양주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토착적인 호족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성북구지역은 남경의 동북쪽 인근지역이었으며 당시 남경의 크기는 지금의 서울도심지역을 합한 것 만큼의 큰 규모였다.
그리고 남경은 유수부 직할로 3군 6현의 속현과 영현관할지로 1부 2주군 1현이 있어 오늘날 경기도 서북부 절반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그리고 성북지역에는 고려시대 남경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보문사 미아사 경국사 등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유명사찰이 건재하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 역점제도에 따라 개성에서 양주를 교통하는 청교도에 노원역이 있어 오늘날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영서역 청파역이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성북구지역은 노원역과 연결되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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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202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