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동595)에 있는 사찰이다.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서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 정릉이 이전되고,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몇 번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다. 1669년(현종 10)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 현재 자리에 중창하였고,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흥천사라고 불리면서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천사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첫 번째 왕후였던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에서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피난생활까지 조선왕실의 역사와 함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2교수단지
성북구 아리랑로 19다길 일대(정릉동 559)에 조성된 마을 이름이다. 원래 이 일대는 정릉의 능역으로 문화재보호지역이었다. 그런데 1965년 서울대 교수들의 주거 확보라는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서울대 주택조합에 택지로 불하되었다. 1970년대 단지 조성 당시 교수단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2백여 세대가 살았는데, 민간 주택조합이 결성되어 개발된 첫 사례였다. 당시에 비해 영역이 확장된 현재는 4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실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거의 없다. 교수단지의 매력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주택들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함께 조성하여 주변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인데, 2014년부터는 정원을 개방하는 등 마을 축제를 이어오고 있다.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3정릉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의안대군)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태조 5) 음력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정릉 코스
(집결지)
출발
1흥천사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동595)에 있는 사찰이다.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서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 정릉이 이전되고,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몇 번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다. 1669년(현종 10)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 현재 자리에 중창하였고,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흥천사라고 불리면서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천사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첫 번째 왕후였던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에서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피난생활까지 조선왕실의 역사와 함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2교수단지
성북구 아리랑로 19다길 일대(정릉동 559)에 조성된 마을 이름이다. 원래 이 일대는 정릉의 능역으로 문화재보호지역이었다. 그런데 1965년 서울대 교수들의 주거 확보라는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서울대 주택조합에 택지로 불하되었다. 1970년대 단지 조성 당시 교수단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2백여 세대가 살았는데, 민간 주택조합이 결성되어 개발된 첫 사례였다. 당시에 비해 영역이 확장된 현재는 4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실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거의 없다. 교수단지의 매력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주택들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함께 조성하여 주변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인데, 2014년부터는 정원을 개방하는 등 마을 축제를 이어오고 있다.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3정릉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의안대군)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태조 5) 음력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성북100경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