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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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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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
    성북동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서울 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영조 41년 (1765)에 설치된 연유로 동명이 붙여졌다. 동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예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水石)이 어울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 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곳이다.

  • 삼선동
    삼선동

    성북천 남서쪽의 서울 성곽을 끼고 있는 삼선동은 조선시대에 혜화문 밖의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인데 삼선평은 이 동 남쪽의 옥녀봉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과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동선동
    동선동

    미아로변 양쪽에 위치한 동선동은 1949년 돈암동에서 분리될 때, 동소문동과 삼선동에서 각각 첫글자를 따서 동명이 제정하였다.

  • 돈암동
    돈암동

    동소문 밖에서 미아리고개까지 그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현재의 미아리 고개를 전에는 『되너미고개』라고 칭하였는데 그 고개이름을 한자로 옮겨 돈암현이란 고개이름에서 돈암동이란 동명이 되었다.

  • 보문동
    보문동

    보문동3가 168번지에 소재한 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년 8월 대통령령 제 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 안암동
    안암동

    안암동은 문헌상 서울의 오래된 동명칭중의 하나로 조선태조 4년(1395년)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빼어나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지역으로 원래 "안암"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안암동3가 대광아파트 단지내 약 20여명이 앉아서 편히 쉴만한 큰바위가 있어 이를 "앉일바위"라 부르고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이라 옮겨 쓴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정릉동
    정릉동

    정릉동이란 지명 유래는 조선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서, 원래 이곳 지명이 沙乙閑里라 했는데 우리말 "살한이"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이 곳에 신덕왕후의 정릉으로 옮겨짐으로 인하여 정릉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 길음동
    길음동

    길음동은 기리묵골을 한자음으로 고쳐쓴 데서 연유되었는데 기리묵골은 의정부 방면에서 도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미아리고개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의정부쪽에서 도성쪽으로 넘어오는 이 고개는 경사가 완만하고 또 정릉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골짜기가 길게 형성되었고 골짜기가 길게 놓여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한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맑고 고와서 물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기분이 맑아지므로 좋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길음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 종암동
    종암동

    종암동의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鍾岩(또는 鼓岩)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종암동은 종암로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西)은 종암1동이, 오른쪽(東)은 종암2동이 되었다가 2007년10월12일 동 명칭 등에 관한 조례가 개정되어 2007년12월30일 종암동으로 통합되었다.

  • 월곡동
    월곡동

    월곡동 동명의 유래는 두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하월곡3·4동의 산지형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신근솔이라는 솔밭이 많아 풍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다. 지방에서 소를 몰고 서울로 들어올 때에는 신근솔에서 숙박을 하고 소를 매어 놓았다가 장위동 노병 도살장에서 소를 매도한 다음 돌 아갔는데 소장사들이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 에 월곡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 장위동
    장위동

    우이천(牛耳川)의 서쪽과 서울 드림랜드 남쪽 일대의 위치한 장위동(長位洞)은 조선시대 초에도 장위리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아 고려조(高麗朝)때 명신(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장위동이 되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위동 사람들 사이에는 『양주밥 먹고 고양굿 한다』는 말이 널리 유행되었는데 이 말은 농토는 양주에 두었고 고양에서 거주 하므로 식생활은 양주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데서 생겼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만 재배되어 특산물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 윤판서(석촌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땅이었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가에서 매도하고 택지로 바뀌어 현재 주택이 밀집되었다.

  • 석관동
    석관동

    석관동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藏山)의 한 맥에 검정 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떡이나 경단을 꼬치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르다가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능인 의능(懿陵)이 이곳에 안치된 뒤부터 돌곶이 능말(마을)로 불렀다고 하는데 돌곶이란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여 석관(石串)이라는 동명이 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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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2024.10.26